일상

샤샤와의 만남

El Dorado 2009. 5. 28. 11:44
11시 30분이 넘어 회사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는 데,
외국인이 나를 부른다....Can u speak English?
전 같았으면 당연히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눈만 꿈뻑꿈뻑 뜨고 있었을 거다.
그래야 다른 사람한테 갈테니까.
사실 떠듬떠듬 손짓 발짓 해가며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지만,
그래 봤자 지도 답답하고 나도 답답할 거 아닌가.
그럴 바에 지천에 널려있는 영어 잘하는 사람을 골라 대화하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겠는가...

근데 나도 모르게 할 줄 안다고 답해 버렸다.
맥주 한 잔 마신 김에 실수한 걸까,
아니면 전화 영어 세달 째 하는 김에 나도 외국인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끈 솟은 것일까.
그것도 아니라면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나에게 말을 거는 외국인이 신기했던 걸까.
비쩍 말랐지만 큰 키에 얼굴이 곱게 잘 생긴 친구다.
이 친구 데려다가 우리 회사 갖다 놓으면 꽃미남 덕에 회사 다닐 맛 난다는
친구들 많겠다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.

그런데 이 친구...악센트가 심상치 않다.
역시 러시아 친구란다. 이름은 샤샤.
아주 당당한 친구다.
내가 영어를 아주 조금 할 줄 안다고 했지, 잘한다는 얘기를 한적이 없는데,
매우 빠른 속도로...게다가 알아 듣기 어려운 억양으로 혼자 마구 떠들어댄다.
이봐...정식 발음으로 천천히 말해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실력이라구.

그냥 계속 혼자 떠들라고 하고 버리고 갈까 하다가,
그냥 듣고 있자니, 결국은 돈달라는 얘기다.
지갑을 잃어버렸고, 친구는 돈을 안 받고...
내일 꼭 돈을 돌려 주겠단다.

ㅎㅎ 그 말을 내가 믿을리가 없지.
게다가 진짜 내 지갑엔 천원짜리 딱 한장이 있는 상황.
담배가 떨어져 카드로 사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던 절묘한 상황에 그가 나에게 돈을 달라고 한다.
당당하게 지갑을 꺼내 보여 주며, 나 돈 없수...

아...첨부터 끝까지 당당한 이 친구.
혹시 근처에 은행이 없냐고 묻는다.
은행에서 돈찾아서 자기한테 달라고 아주 당당하게 얘기한다.
허어...이 녀석 참...거의 돈을 맡겨놓은 수준이다.
그러면서 또 뭔가 한참을 떠든다.

혼자 생각한다.
이 녀석은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나한테 삥을 뜯으려 하고 있는 걸까.
밤은 벌써 11시 반...이 녀석도 들어가서 자야 할 시간인데,
큰 돈도 아니고 2만원을 달라고 조르고 있을까.
혹시 진짜 지갑을 잃어 버린게 아닐까 순진한 생각을 해본다.

뭐 이 녀석이 지갑을 잃어버려서 돈을 빌리든,
그냥 2만원을 벌 목적으로 돈을 삥뜯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.
양쪽이 다 이 녀석 입장에선 그다지 행복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...
그게 본질이다.

먼 이국땅에 와서 생면부지의 사람을 대상으로 확률 낮은 삥을 뜯는 친구라 한들...
그 신세가 지갑을 잃어버린 신세보다 못하면 못하지 대체 뭐가 낫단 말인가.
에라 모르겠다. 그냥 2만원을 주자.
그냥 모른 척 가버리면 왠지 집에 가는 내내 찝찝할 지 모를 일이다.

올해 힘든 시간을 겪으면서, 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 넓어진 느낌이다.
내가 아픈 삶을 살면서, 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진심으로 감사한다.
어쩌면 샤샤는 내게 2만원을 받아 들고 나서 나보고 순진한 친구라고 비웃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.
하지만, 그의 생각이 어떠하든, 나는 그를 도왔고, 그럴 수 있는 마음의 여유가 있음에 감사한다.

주위를 살필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해본다.
내 자신의 아픔에 겨워 세상을 미워하고, 타인을 미워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해본다.
참 많은 것을 잃었지만, 나는 여전히 지켜야 할 것이 많이 있고,
사랑할 대상 들이 너무도 풍성히 주어지지 않았는가.

내게 속한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, 아픔을 내려놓고,
온전히 내 삶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시간이다.
샬롬의 평강이 조금은 내 안에 임하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함이 느껴진다.
주님...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제게 주세요.